요즘 전세를 구하는 분들을 보면 세대마다 믿는 안전장치가 다릅니다. 20대와 30대는 전세보증보험을 먼저 떠올립니다. 반대로 50대 이후 어르신들은 전세권 설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어르신들 중에는 전세권만 걸어두면 내 전세금은 무조건 안전하다고 믿는 분이 꽤 많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세권은 그렇게까지 무적이 아닙니다.
전세권을 두고 양쪽이 부딪쳤습니다
얼마 전, 연세가 있으신 어머님 한 분이 전세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살던 집이 재개발로 비워줘야 해서 새 전세를 찾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분명했습니다. 반드시 전세권 설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마음에 쏙 드는 집이 나왔습니다. 집 안도 깨끗하고, 등기부등본도 흠 하나 없이 깨끗한 집이었습니다. 빚이라곤 잡혀 있지 않은, 전세 들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주인도 만만치 않은 분이었습니다. 자기 집에는 전세권 설정을 해줄 수 없다는 겁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나중에 세입자가 나가면서 전세권을 말소할 때 등기부에 줄이 그어진 흔적, 이른바 ‘빨간 줄’이 남는데 그게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은 전세권을 꼭 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렇게 양쪽 다 고집이 센 분들을 만나면 중개하는 입장에선 참 난감합니다. 하지만 이걸 풀어드리는 게 제 일입니다. 그래서 어머님께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습니다.
전세권은 무적이 아닙니다
어머님이 오해하신 부분은 이렇습니다. 전세권만 설정하면 무슨 일이 생겨도 내 보증금이 1순위로 지켜진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집에 빚이 없고 등기부가 깨끗한 경우라면, 전세권을 따로 걸지 않아도 됩니다. 이사하면서 전입신고를 하고 계약서에 확정일자만 받아두면, 그 집이 혹시라도 경매로 넘어갔을 때 다른 빚보다 먼저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순위를 갖게 됩니다. 전세권을 설정한 경우와 비교해도 돈을 돌려받는 순서는 사실상 같습니다.
그러면 전세권은 무엇이 다를까요. 전세권은 받는 돈을 더 많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보증금을 못 받을 때 직접 경매를 거는 절차를 조금 더 간단하게 해주는 것뿐입니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만 있는 경우에는, 내가 직접 경매를 걸려면 먼저 보증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에서 이겨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전세권이 있으면 그 소송 없이 바로 경매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딱 그 정도 차이입니다. 게다가 전세권은 등기를 하는 것이라 등록 비용과 법무사 수수료가 따로 듭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빚이 없고 등기부가 깨끗한 집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 집에 이미 은행 대출 같은 선순위 빚이 잡혀 있다면, 전세권을 걸든 확정일자를 받든 그 빚보다 순위가 뒤로 밀리는 건 똑같습니다. 전세권이라고 그 줄을 뛰어넘지는 못합니다. 전세권이 무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집주인 손에 달린 권리입니다
사실 전세권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전세권은 집주인이 동의해줘야만 설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등기를 집주인과 함께 신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처럼 집주인이 싫다고 하면, 아무리 세입자가 원해도 전세권은 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는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 없습니다. 세입자가 주민센터에 가서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무적이라고 믿었던 전세권이, 정작 집주인이 반대하면 한 발도 못 나가는 권리인 셈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전세권은 원칙적으로 건물에만 효력이 미칩니다. 그래서 단독주택이나 다가구주택처럼 땅과 건물이 함께 묶인 집이라면, 나중에 땅이 경매로 넘어갈 때 전세권만으로는 그 땅값에서 돈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는 건물뿐 아니라 땅까지 포함해서 보증금을 지켜줍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확정일자가 더 든든한 셈입니다.
설득 끝에, 무사히 돌려받았습니다
그날 그 어머님은 제 설명을 끝까지 들으시고, 결국 전세권 없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만 챙겨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은 그 집에서 전세금을 무사히 돌려받고 나오신 지도 꽤 됐습니다. 전세권을 걸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혹시 전세권 설정을 두고 고민하고 계신다면, 순서를 이렇게 잡으시면 됩니다. 먼저 등기부등본을 떼어 그 집에 선순위로 잡힌 빚이 있는지부터 확인하세요. 빚 없이 깨끗한 집이라면, 전세권에 비용과 집주인 동의까지 들일 것 없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를 빠짐없이 챙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전세권은 전입신고가 불가능한 집이거나 법인 계약처럼 확정일자를 받기 어려운 특별한 경우에 의미가 있습니다. 전세권은 무적이어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골라 쓰는 도구일 뿐입니다.
※ 이 글은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며, 개별 사안의 법적 판단은 등기부 상태와 권리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 계약 전에는 등기부등본을 직접 확인하시고, 필요하면 법무사나 변호사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