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님, 짐 몇 개만 놔두고 가면 안 됩니까?”
월세 보증금 1,0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한 임차인이 내게 물었다. 직장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야 했지만 임대인은 당장 보증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임차인이 돈을 급하게 써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보증금 1,000만 원이 당장 없어도 옮겨 간 지역에서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직장인이었다. 그렇다고 자기 돈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더 답답한 것은 집을 계속 붙잡아 두는 방법이었다.
짐 몇 개를 남겨두면 되는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장거리를 오가야 하는지, 집주인에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줘도 되는지 계속 물었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시간과 교통비를 들여 빈 원룸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을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3개월 넘게 미리 말했는데 임대인은 보증금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 계약은 기간이 끝난 뒤 묵시적으로 갱신된 상태였다.
임차인은 관련 내용을 미리 공부해 두었다. 부동산 여러 곳에도 물어봤고, 묵시적 갱신 후에는 임차인이 해지를 통보할 수 있으며 그 통보가 임대인에게 도달한 날부터 3개월이 지나면 효력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직장 문제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임차인은 3~4개월 전에 임대인에게 미리 알렸다.
“몇 월에는 직장 때문에 이사해야 하니 보증금을 준비해 주세요.”
묵시적 갱신 후 해지는 임대인이 통보를 받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야 효력이 생긴다. 통화로만 끝내지 않고 문자나 내용증명으로 통보한 날짜와 도달 사실을 남겨두는 것이 안전하다.
갑작스럽게 나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임대인이 자금을 마련하거나 새로운 임차인을 구할 시간도 충분히 줬다.
그런데 임대인은 묵시적 갱신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계약이 연장되면 무조건 1년을 다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시적 갱신은 임대인이 생각한 ‘무조건 1년 자동 연장’이 아니다. 법에서는 갱신된 임대차의 존속기간을 2년으로 보지만, 임차인은 언제든 해지를 통보할 수 있고 임대인이 통보받은 날부터 3개월이 지나면 해지 효력이 발생한다.
임차인이 나갈 수 있다고 하자 임대인은 오히려 나에게 전화해 묵시적 갱신이 무엇인지, 정말 3개월 뒤에 나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보증금 1,000만 원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 임대인은 자신의 다른 전세금이 묶여 있어 당장 돌려줄 돈이 없다고 했다.
묵시적 갱신과 해지 통보가 헷갈린다면 1년 더 살겠다고 말했는데 묵시적 갱신일까에서 상황별 차이를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짐 몇 개만 남기면 점유가 유지됩니까?”
임차인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법원 신청서가 아니었다.
“냉장고나 가방 같은 짐을 몇 개 남겨두면 집을 계속 점유하는 것으로 인정됩니까?”
“한 번씩 다녀와야 합니까? 거리가 너무 먼데 안 가면 문제가 됩니까?”
나는 짐의 개수만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점유는 물건 하나를 놓아두었느냐보다 실제로 누가 그 집을 지배하고 관리하는지를 종합해 판단한다. 임차인이 출입문을 잠그고 관리하는지, 임대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지, 집을 새 임차인에게 보여주도록 열어뒀는지 같은 사정이 함께 문제가 된다.
실제로 주민등록과 열쇠만 유지했을 뿐 짐을 모두 빼고,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문을 열어둔 사안에서는 점유를 잃었다고 판단한 사례도 있다.
가방 하나를 놔뒀다고 무조건 점유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면 된다는 정해진 횟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임차인은 먼 곳까지 계속 왕복하기 어려웠다. 어설프게 짐을 남긴 채 점유 여부를 두고 다투는 방법은 이 사람의 생활과 맞지 않았다.
나는 임차인에게 말했다.
“짐 몇 개로 점유를 유지하려 하지 마십시오. 계속 관리할 수 없다면 임차권을 등기부에 확실히 남긴 뒤 집을 완전히 넘기는 편이 낫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대신 임차권을 등기부에 남겼다
임차인은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기로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청서 접수가 아니었다. 실제 등기부에 임차권등기가 기재되는 시점까지 기존 원룸의 점유와 전입신고를 함부로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고 바로 짐을 빼거나 전출하면 안 된다. 임차권등기가 완료되기 전에 주택의 점유를 잃으면 기존 대항력이 소멸할 수 있고, 나중에 임차권등기가 완료돼도 사라진 대항력이 과거로 소급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임차인은 내 설명을 듣고 등기부에 임차권이 실제로 표시된 것을 확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등기가 완료된 뒤에야 남아 있던 짐을 모두 빼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다음 집주인에게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이제 집을 보여주셔도 됩니다. 새로운 임차인이 구해지거나 집주인께서 보증금 1,000만 원을 마련하시면 보내주세요.”
짐도 빼고 비밀번호도 넘겼지만 보증금 반환청구권과 기존에 확보한 대항력·우선변제권은 임차권등기를 통해 남겨둔 상태였다.
임차권등기의 신청 시점과 완료 시점이 다른 이유는 임차권등기명령 신청 후 이사 가도 될까?에 별도로 정리해 두었다. 이번 글에서는 신청 절차보다 그 이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에 집중한다.
임차권등기가 표시되자 집을 보러 오지 않았다
임대인은 새로운 임차인을 구해 받은 보증금으로 기존 임차인의 1,000만 원을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등기부에 임차권등기가 표시된 뒤로 상황이 달라졌다.
중개 현장에서 그 방을 설명하려면 임차권등기가 왜 되어 있는지부터 알려야 했다. 이전 임차인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해 임차권등기를 신청했다는 사실이 등기부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도 임차권등기가 끝난 주택에 그 이후 들어온 임차인은 주택임대차보호법 제8조에 따른 소액보증금 최우선변제를 받을 수 없다.
새 임차인의 모든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주택 인도와 주민등록을 갖추면 대항력을, 확정일자까지 갖추면 일반 우선변제권을 취득할 수 있다. 다만 소액임차인에게 중요한 최우선변제를 받을 수 없다는 점은 월세방을 구하는 사람에게 충분히 부담스러운 기록이었다.
실제 현장에서는 그 뒤로 방을 보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임대인이 생각했던 흐름은 막혔다.
새로운 임차인의 보증금을 받아 이전 임차인에게 돌려주는 방법이 작동하지 않았다. 임차권등기는 기존 임차인의 권리를 보존하는 기록이면서, 적어도 등기 당시에는 보증금이 반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 계약 희망자가 확인하게 만드는 기록이었다.
결국 새 임차인 돈이 아니라 집주인 돈으로 반환했다
임차인은 당시 보증금 액수와 주택의 권리관계를 확인한 뒤, 경매로 넘어가더라도 소액임차인 보호 범위 안에서 회수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보증금이 1,000만 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경매에서 무조건 전액을 받는 것은 아니다. 최우선변제 여부는 주택 소재지, 계약 시기, 대항요건, 선순위 권리, 배당요구와 실제 매각대금에 따라 달라진다.
임차인은 당장 돈이 없어 생활이 막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급하게 불리한 합의를 하지 않았다. 장거리를 오가며 빈집을 지키지도 않았다. 등기부에 권리를 남겨두고 기다렸다.
그렇다고 보증금이 1,000만 원이라서 아무 조치 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급명령이나 보증금 반환청구, 지연손해금 청구를 검토할 수 있다.
임차권등기명령 신청과 실제 임차권등기에 들어간 비용도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임대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임대인의 보증금 반환의무와 임차인의 주택 인도의무는 원칙적으로 동시에 이행해야 하는 관계다. 이자나 지연손해금을 청구하려면 임차인이 언제 집을 인도했는지, 또는 보증금 지급과 동시에 언제든 인도할 준비가 돼 있었는지도 중요해진다.
이 사건에서는 임차권등기가 완료된 뒤 짐을 모두 빼고 도어락 비밀번호까지 전달했기 때문에 집을 인도한 시점이 비교적 분명했다.
임대인도 더는 새 임차인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등기부의 임차권등기가 새로운 계약을 현실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임대인은 여기저기서 자금을 마련해 보증금 1,000만 원을 임차인에게 돌려줬다.
이 사건에서 임차인이 남긴 것은 가방이나 냉장고가 아니었다.
멀리 이사한 뒤에도 자신의 권리를 지켜 줄 임차권을 등기부에 남겼다. 그 선택 덕분에 장거리 왕복도 하지 않았고, 애매하게 점유를 유지하다 권리를 잃을 위험도 피했다.
보증금을 못 받은 임차인에게 짐 몇 개를 남기는 방법이 언제나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집을 관리하기 어렵고 반드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야 한다면, 물건으로 점유를 흉내 내기보다 임차권등기를 완료한 뒤 집을 넘기는 방법이 훨씬 명확하다.
임대인도 묵시적 갱신과 보증금 반환 시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새로운 임차인이 구해져야만 기존 보증금을 줄 수 있다는 계획은 반환계획이 아니다. 계약 종료일에 맞춰 임대인이 직접 자금을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다.
확인한 공식 자료
- 주택임대차보호법 제6조의2|묵시적 갱신 후 계약 해지
-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의3|임차권등기명령
- 대법원 2025. 4. 15. 선고 2024다326398|임차권등기 전에 점유를 잃은 경우
※ 이 글은 실제 중개 현장에서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개인정보와 일부 상황을 재구성했다. 최우선변제 여부, 임차권등기의 효력과 보증금 반환청구 방법은 주택 소재지, 계약 시기, 전입·점유 상태와 선순위 권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안은 법률 전문가에게 확인하기 바란다.
